(33)제주도 최초 야당 국회의원…4·19 직후 민주당 구파로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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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삼, 계몽운동 전개, 요시찰 인물 지목…고기종, ‘방축고을’ 설촌
고남부, 제주도의원 등 역임…고노-마사가츠, 도내 선진 상술 전파
고담룡, 고검클럽 항일활동…자유당 탈당 후 민주당 道당위원장 당선
▲ 일제강점기 때 제주시 칠성통의 반상점(伴商店)으로, 잡화를 팔았던 일본인 가게 모습이다. 이 상점은 나중에 한양상회가 됐다. 상점 왼쪽 집이 제주약국(김두봉 운영)이다. 전봇대 옆의 짐을 실은 자전거와 간판, 상점 안 풍경, 일본어로 쓰인 광고 문안 등이 이채롭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권삼高權三:1901(광무5)~1950(납북), 교수. 성산면 온평리<열운이> 태생으로 정의旌義현감과 고창高敞현감을 역임한 고계정高啓正의 손자, 해방 후 초대 성산면장인 고은삼高殷三의 아우.


동경 유학생 시절 즉 1921년 5월 1일 성산청년회를 조직하고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 민족주의 사상을 청년들에게 전파한 관계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요시찰要視察 인물로 지목받았다.


1927년 3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 연구실에 재직하였다.


광복 후 동국대학 교수, 서울대학 강사 등을 역임하더니 1950년 6·25 당시 서울에서 납북拉北당하였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10월에 ‘대판大阪과 반도인半島人’이란 단행본을 오사카에서 간행한 바 있었다. 또 1930년에 일어판 ‘조선근대정치사朝鮮近代政治史’를, 1933년에 일어판 ‘조선정치사강朝鮮政治史綱’을, 1947년 한글판 ‘조선정치사’를 발간했다.


▲고기종高起宗:1632(인조10)~?, 문신. 제주성 동문 밖 고득종의 9세손, 고수형高壽亨의 아들, 제주시 봉개리<봉아름> ‘명도암明道菴’으로 옮겨 살았다. 아버지 고수형은 명도암 김참봉(金晋鎔)과 처남매부의 사이였다.


그 후 애월읍 상가리<상더럭>로 옮겨 글공부를 하고서 구좌읍 한동리<웃-궤>로 다시 옮겨 ‘방축고을’을 설촌하여 정주定住하였다.


1675년(숙종1) 3월 제주순무어사 이선李選이 내도하여 시취試取할 때 응시, 김계흥金繼興 등과 함께 4명이 초시에 급제하였다.


이때부터 제주도의 문무관文武官에게는 특혜로 상경할 때 급료로서 말을 받게 되어 이를 정례定例로 삼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까지 실시해 왔다.


1676년 전시殿試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고기종은 충청도의 태안현감을 지낸 고이지高以智의 증손인데 관직은 성균 정자正字를 지냈다.

 

1686년(숙종12) 문신으로서 중시重試를 보게 되었으나 집안이 가난해 부득불 시험에 응시할 수 없어 특별히 쇄마刷馬를 하사받아 임금의 은총을 얻었다.

 

▲고남부高南富:1923∼1999, 제주도의원, 한경면 용수리에서 고희붕高羲鵬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일하여 이케다(池田)상업학교를 졸업, 1960년 12월 12일 제3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북제주군 제4선거구에 입후보하여 3232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후 고씨종문회총본부회장, 제주신문 업무국장, 귀엄貴嚴수리조합 상무이사, 제주상공회의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제주시교육장을 역임한 고광옥의 선친이고, 연세대학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고기철 변호사와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고기승 변호사의 조부이다.


▲고노-마사가츠:1883~?, 제주 거류居留 일본인, 사업가, ‘고노-마사가츠’<河野正一>는 일본 나가사키<長崎>현縣에서 태어나 미국美國에 건너가서 선진국先進國 문명을 배웠다.


영국의 식민지植民地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떤 유의 착취로 어떻게 재력을 이루었나를 탐구하고 돌아왔다.


1913년 제주로 들어와서 ‘제주-성안’ 칠성통七星通 거리에 자리를 잡아 철물 및 선박기구 상점을 운영하고 제주 굴지屈指의 최대 상점을 이루었다. 이들은 새로운 상술을 처음 섬 안에 전파시킨 사람들이다.


선진 상술을 배운 제주인은 잡화 무역상에 박종실朴宗實, 사진업에 김석진金錫珍, 인쇄업에 임기호任基鎬, 변호사업에 최원순崔元淳, 양홍기梁洪基, 대서업에 김태휴金太休, 고영은高英殷, 오홍석吳苰錫, 자전거상에 강원필康源弼 등이다.

 

▲고담룡高湛龍:1915(일제강점기)~1989, 일본에서 고검高檢 클럽의 항일활동. 교육자. 국회의원. 호는 동일東日,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고남곤高南崑의 아들이다.


1931년 1월 조천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주동자로 졸업사정회査定會에서 제외되었다.


일본 도쿄에서 1942년 중앙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43년 귀국, 비밀 결사의 사건이 5년 만에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고문高文 클럽’으로 활동, 1943년 5월 체포되었고 1945년 광복이 되자 출옥되었다.


성균관대학 교수 겸 학생과장을, 또 국민대학 교수 겸 교무과장을 역임, 제주도에 돌아와 오현고등학교 교감 및 제주대학 강사를 지냈다.


자유당 도당부는 1954년 10월 김충희金忠熙 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계와 김찬익金贊益과 양병직梁秉直 두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비주류계 사이에 당권 장악을 위한 내분이 벌어져 1955년 3월 고담룡이 도당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파란이 일어났다.


고담룡은 자유당 도당 위원장을 지내다가 당의 내분으로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 지방당부 창당을 주도하였다.


1955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저지하는데 고담룡을 중심으로 민주당 제주도당부 창당이 이뤄졌다. 동년 9월 정식 창당이 되었는데 본도 최초의 야당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담룡은 본도 최초의 야당 국회의원으로 출발하는 기록을 세웠다.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제주시 선거구)에 당선됐다.


1960년 4·19 직후 민주당 구파로 입후보하여 7905표를 획득, 무소속 후보인 재일 교포 김진근金晋根(46·이호, 7134표)을 눌러 재선, 국회에서 내무분과 간사를 역임하고 민주당 제주도당위원장이 되었다.


얼마 후 민주당 신파는 12월 6일 신민당으로 출범, 위원장에 강재량, 부위원장 임병수任炳洙와 신현범申鉉範을 선출하였다.


한편 제주도의회에서의 ‘4·3 양민 학살 사건 조사 및 건의안 제출의 건’은 국회 양민 학살 진상 조사단이 1960년 6월 6일에 내도하겠다고 알려옴에 따라 도의회 차원에서도 조사해 국회 조사단에게 제출하려고 의결함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국회에서는 자유당 정권의 붕괴에 따라 그 동안의 논의가 금기시되어 왔던 경상남도 거창지역의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요청이 경남 출신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제기되어 국회 차원에서 진상을 조사하기로 결의가 이루어졌다.


고담룡의 저서로 ‘법학개론’이 있다.


1989년 12월 6일 전남 광주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타계, 대전 국립묘지 독립 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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