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택일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집 근처서 토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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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전에 택일과 관의 틈 메우기 끝내야…행상 시 상두꾼에 쌀밥·몸국 등 대접
준비된 돌로 담 쌓고 사이에 돌 채워…산담서 족제비 잡아 학비·살림에 보태기도
▲ 1980년 초 모슬봉 기슭으로 가는 행상. 상여를 매는 사람은 좌우로 5명, 앞뒤로 2명 합해 모두 12명이다. <사진=김유정>

강영화(姜永化, 1938~) 선생은 80세로 대정읍 구억리에 거주하며 1남 5녀를 두었다. 지난 시절 상·장례의 기억과 산담에서 족제비를 잡은 이야기를 들었다.

 

▲온향


동네에서 상(喪)이 나면 상주는 마을 이장에게 온향을 한다고 알린다. 온향을 하게 되면 동네 남자들이 전부 나와서 도와준다. 물을 많이 쓰기 때문에 여자들은 수눌음으로 물을 계속해서 길어온다.

 

온향을 하게 되면 상 난 집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다 아침식사를 대접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은 온향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집에 상이 나면 동네 심부름을 하는 하인이 1970년대까지 있었는데, 부이장은 그 하인에게 누구누구에게 얘기하라고 지시를 한다.


상이 나면 택일을 하는데 장날(장례일)까지 3일 이내이면 집에 시신을 7군데 묶어서 입관하여 보관했다가 장사를 지내고, 상주가 멀리 가서 한 달 후에 올 수 있거나, 상주가 여러 명이어서 택일이 빨리 나오지 않는 경우에 토롱(土壟)을 한다.

 

토롱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정하게 되는데, 자기 밭이나 남의 밭이라도 빈 밭이면 허락을 받아서 하게 된다.

 

토롱을 할 때는 땅을 임시로 파서 관을 놓고 관 주변에 조찍(조짚)을 세우고 그 위에 흙을 조금 덮는다. 다시 그 위에 노람지를 둘러서 비가 들어가지 않게 하고,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띠로 묶고, 가시로 덮어서 쥐나 새가 들어가지 못하게 마감한다.


토롱을 할 때 가장 곤란한 것은 그 사이에 시신이 부패해서 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촛농으로 관의 틈을 메꾸기도 하고, 가시리 풀로 관에 창호지를 붙이기도 한다. 나중에는 비닐이 나와서 비닐로 관을 쌌다.

 

관을 만들 때 그 널판에다 끌로 찍어서 별 모양을 7개 만들어 칠성판을 만든다.


▲행상(行喪)


상여(喪輿)를 처음 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고 당시 구억리는 인구도 적어 젊은 사람이 부족해서 행상(行喪)을 한 것이다.

 

상여를 매는 사람은 좌우로 5명, 앞뒤로 2명 합해서 모두 12명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까지 처음으로 상여를 매고 갔는데, 거기는 옛날 동네 할아버지가 4·3 사건 일어나기 전에 살던 집터였는데, 소개(疏開) 돼서 내려와 보니 빈 밭이 돼버려서 그 할아버지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곳에 살다가 돌아가시니까 그 밭에다 산을 쓴 것이다.


나는 그때도 키가 큰 편이여서 요령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여를 매는데 가운데 자리로 들어가게 됐다.

 

키가 큰 나를 중심으로 앞뒤 사람은 어깨에 끈을 걸치기만 하면 될 정도로 힘이 덜 들었지만, 난 허리가 잘라지는 느낌이 날 정도로 무척 힘이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중간에 그만둘 수가 없어서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1980년대까지 행상을 했다.


상여 매는 사람들(상두꾼)에게 쌀밥과 몸국, 꿰미(대꼬지에 길게 썬 삶은 돼지고기 3~4점을 꿴 것)를 준다. 17살 미만은 주지 않는다. 복친(친척)은 꿰미 2점 정도 꿰에 준다.

 

한 번은 상여를 매고 멀리 정물오름까지 간 적이 있는데 좁은 길을 갈 때는 가시나무가 있더라도 그걸 밟고 지나가야 한다.

 

가다가 힘이 들면 상여를 내려놓고 잠시 쉬는데, 상주인 아들딸 중에서 질수육(상여를 멈춰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한다. 주로 모멀(메밀) 돌레떡, 침떡, 조떡(조시루떡) 등에다 술을 준다. 길이 멀면 힘드니까 질수육을 여러 번 한다.

 

 

▲ 강영화 선생은 산담 구석에 족덫을 놓았다.

▲산담


상주들이 상두꾼에게 수고한다고 대접하는 것을 필역(畢役)이라고 하는데, 필역은 옛날에는 음식으로 했었는데 나중에는 양말 같은 것을 주었는데, 주는 집도 있고 주지 않는 집도 있다.


그러나 점심밥은 잘 먹인다.


상이 나면 먼저 산담 돌을 준비해 놓는다. 나도 아버지가 1992년 돌아가셨을 때 돌이 없어서 모슬포에 덤프트럭으로 돌 날라다 주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돌을 4차인가 5차를 부탁했었다.

 

장사(葬事) 날에 산담도 같이 쌓아야 하기 때문에 돌은 미리 준비해야지 장사 당일 준비하는 것은 힘들다.

 

마을공동체에서는 평소 마을 일을 잘 돌본 사람인 경우는 산담까지 잘 쌓아주는데, 마을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인 경우는 봉분만 해주거나 산담을 쌓는다 하더라도 마무리를 잘 해주지 않는다.

 

한 예로 마을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집에 상을 당했을 때 사람들이 상여를 매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놓고 상주에게 혼자서 매고 가라고 했다 한다.

 

당황한 상주가 사정사정해 장지(葬地)까지 겨우 갔다는 일화가 있다.


개광(開壙)하여 하관 한 후 달구소리(상여의 가로 기둥으로 봉분이 올라갈 때마다 쿵쿵 찧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봉분한 다음 산담을 쌓는다.

 

산담을 쌓을 때는 밭담의 돌은 가져오지 않는다. 머들이나 굴러다니는 돌로 접담을 쌓는데 그 폭이 보통 1~1.5m 정도이다.

 

봉분이 크면 거기에 비례해서 산담도 넓고 높게 쌓아야 하기 때문에 돌이 많이 들어간다.


돌이 모자라면 여자들도 모두 와서 돌 하나씩이라도 주워 놓았다. 산담을 쌓을 때는 먼저 새끼줄로 형태를 만들어 놓고 겹으로 담을 쌓고 그 사이에 돌을 채운다.

 

산담 네 귀에 혹시나 무너질까 봐 큰 돌(어귓돌)을 놓는다. 이 어귓돌은 사위나 외손자가 굴려다 놓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주로 공동묘지를 이용했기 때문에 산담도 하지 않게 됐다. 


▲산담 안에서 족제비를 잡다


산담 안에서 족제비를 잡았다. 동네마다 다니며 족제비를 사가는 사람이 있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이었는데 육지 사람이었다.


나는 족제비를 1950년대 초부터 잡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다니기 시작해서 중학교때까지 잡았다. 당시 족제비 한 마리가 보리쌀 5말 정도 했다. 족제비 잡아서 학비와 살림에도 보탰다.


1년에 1~2마리정도 잡았다. 주로 12살~18살 정도의 아이들이 잡았다. 밭담이나 산담 등의 모서리에 족덫(족제비 덫)을 놓는다.

 

족제비는 돌 틈에 산다. 1950년도 6·25 전쟁이 나기 직전에는 마을마다 순경이 경비를 서 주는데 함부로 들에 나가지 못했다.


덫을 놓고 1주일에 한번 정도 나가서 확인을 했다. 한 번은 나가보니까 족제비가 한 마리 덫에 걸려있었다.

 

족제비는 쥐를 잡아먹는다. 족제비를 잡으려면 니껍(미끼)을 놓는데 닭 벼슬, 돼지고기, 쥐를 이용했다.


옛날에 여자들이 얼레빗으로 머리빗을 때 나온 머리카락을 집  돌담 틈에 끼워놨었는데 그것을 한 주먹 가져다 태우면 그 냄새가 멀리까지 간다.

 

족제비가 그 냄새를 맡고 와서 니껍을 먹으려다 덫에 걸린다. 덫은 Y자 나무로 만드는데 대나무로 얽어서 탄탄하게 만든다. 족제비는 늦가을부터 겨울에 잡는다. 봄이 되면 털이 빠진다. 족제비 꼬리는 붓 만드는데 사용한다.


족제비는 잡은 다음 거죽을 벗겨서 속에 산듸짚 등으로 채워서 말려 박제를 만들었다. 덫에 걸린 족제비를 금방 가져오지 못해서 상했을 경우는 값을 덜 쳐줬다. 그러나 상한 경우라도 꼬리털을 쓰는 데는 지장이 없다.


삵(살쾡이)도 예전에는 많아 닭도 물어가 버렸다. 그런 삵이 내 덫에 걸렸다. 큰 고양이만 하고 색깔도 비슷하다,


삵은 꼬리가 없다. 삵도 팔았다. 삵은 목도리도 하고 모자도 만들어 썼다. 그때는 삵도 귀한 것이었다. 지달이(너구리)는 보약으로 썼는데 고기 맛이 좋다. 기름도 맛이 좋다. 기름은 허물 난데 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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