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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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전 중등교장/시인

추석 며칠 전 숙면에서 깨어나 아침과 대면했을 때이다. 창밖을 보니 이웃과 경계 지은 돌담 일부가 허물어져 있었다. 태풍이 불었다면 선잠에서 눈을 비비며 수용했을 광경이 생경했다. 강풍 소식도 없었는데 짓궂은 바람의 난장을 떠올리며 무너진 돌담 곁으로 다가갔다.

돌덩이는 스스럼없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묵직한 삶을 추구하는 이념의 강골들이다. 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었다. 강철 같은 송악 넝쿨이 얼기설기 틈새를 막으며 뭉쳤으니 난공불락의 성벽이었는데 속절없이 무너졌다니. 바람 길을 막은 폐쇄적 삶의 결과이다. 곁에서 탈 없이 서 있는 돌담이 숭숭 뚫린 입으로 소통의 미소를 짓고 있다.

존재는 관계를 맺으며 흐를 때 온기를 띠고, 포용과 사랑으로 성장하며 아름다움을 이룬다. 인생의 지향점으로 향하는 길은 이렇게 단순하고 평이한데도 돌아보면 역주행에 움찔하곤 한다. 복잡한 손익계산으로 장막을 치고 무지한 신념으로 시비를 재단하고 있음이 아닌가. 이럴 땐 기도로 평화를 간구한다. 순간의 결실이다. 비어 있는 마음을 느끼며 잔잔한 환희를 맛본다.

풍습대로라면 이웃의 뒤란으로 돌덩이들이 넘어졌으니 그쪽에서 도로 쌓아야겠지만 누가 한들 무슨 상관이랴. 막내아들과 끙끙대며 돌담을 재건한다. 무게의 힘이 서로에게 의존하도록 균형을 잡는다. 그것들 기대는 면적이 크면 클수록 따스한 이웃이 될 터이다. 육체의 땀방울은 정신의 청량제인가, 기분이 상쾌하다.

최근에 접한 극명한 두 기사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그들의 영혼을 헤아리게 된다.

“누가 탄환을 쐈는지 알면 원망할 것 같고, 그 병사가 큰 자책감과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인근 사격장에서 날아든 유탄에 허무하게 아들을 잃은 이 모 상병 아버지의 말이다. 영혼의 꽃을 본다. ‘내 아들 같은 억울한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빗나간 총알을 쏜 사병을 반드시 찾아내 엄벌해 달라.’고 말했어도 아비의 심정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 속의 비범을 보여주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영혼을 승화시키는 힘일 것이다.

대조적으로 악의 기사를 접하고 아연실색했다. 성형외과 의사 빈 모 씨가 자신의 집에서 재혼한 아내를 살해한 죄로 35년 형을 구형 받았다는 내용이다. 돈을 챙기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미국 등에서 사형 집행 때 사용하는 약물을 투입했다니 악마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생명을 보듬고 아름다움을 키워야 할 젊은이가 멸시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업자득이라며 돌팔매질하기엔 건넌 세월이 아득하다. 그럼에도 부끄럼 없이 하늘을 우러를 수 없는 삶을 반추하며 전하고 싶은 말을 찾는다. 아직 참회하고 영혼을 위로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긴 추석 연휴 동안 적막하던 집안이 온통 소리들로 넘쳐났다. 세 식구에서 두 아들네 여섯 가족이 불었으니 왁자지껄 그 자체였다.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서로를 잇는 징검다리가 되고, 어린 손주들의 재롱은 삶을 곧추 세우는 활력소가 되었다.

38개월도 안 된 손녀와 제법 긴 문장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놀랐다. 언어구사력은 팔 할쯤 생득적일 것이란 믿음에 이르며, 일상도 태반은 주어진 길을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침잠하게 되었다. 주어진 배역에 만족하는가는 자신의 몫이지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실존의 핵이 아닐까.

마당의 감나무가 주황색 등을 켜 놓았다. 이렇듯 시간은 새롭게 채색하면서 또렷한 이정표로 갈 길을 인도한다. 자연으로 살고 싶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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