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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제주교육 발전을 위한 집념과 기행·일화 지금도 회자

기사승인 2017.10.11  09: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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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륜학원 설립

   
▲ 지난달 열린 강석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식에서 원희룡 도지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강상백姜祥伯:1898(광무2)~1941(일제강점기), 서당 훈장, 시인.


호는 수산水山. 본관은 진주, 중문면 대포리<큰-개>에서 강흥팔姜興八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수산은 김재현, 이호진 등과 함께 향리의 우포愚浦 김종훈金鍾勛(1877~1949)에게 한문을 배웠다.


색달리에 세운 ‘수산 강상백선생 추모비’는 평소 스승의 훈육에서 나온 일이었다. 앞서 1916년 보천교普天敎의 신도가 되었다. 1930년 귀향, 중문면 색달리 감수동甘水洞에서 서당을 개설, 계몽운동에 기여하였다.


1940년 4월에 대포리의 양여항梁麗恒, 강기봉姜岐鳳, 중문리의 고승옥高升玉 등과 함께 제주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구류 45일 만에 석방되었다. 아들도 한시로 유명하고, 다른 아들은 현대시로 굳힌 문인으로 배출되었다.


더구나 안덕면 창천 출신 양훈장에게 7년간이나 배웠다. 일제강점기에 교세가 날로 증폭되어 1920년대 초에는 교인이 2만 명이나 될 때도 있었으니 일제당국은 물론 기독교 측에서도 두려운 존재로 적대시하였다.


1936년 교주 차경석車京錫이 죽고 또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 해산령’에 의해 교단은 해체되었다. 수산은 증산甑山 사상에 심취, 보천교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전북 정읍井邑으로 건너가 수도생활에 침잠하기도 하였다.


1918년 산남 법정사法井寺에서 보천교도들이 집단 항일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국권상실 이후 본도에서 가장 먼저이면서 가장 규모가 큰 항일운동이었다. 수산도 이 운동에 참여,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저항한 후 항일동지들이 체포되자 육지부로 피신해 버렸다.

 

   
▲ 강상백 추모비追慕碑.

좀 잠잠해지자 다시 정읍井邑으로 들어가 민족종교와 한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형사상 문제가 될 수 있는 시효가 만료되었다.


1941년 3월 일제는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 일제당국에 비협조적인 인사를 무조건 구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지만 수산은 이 악법이 공포되기 2개월 앞서 즉 1월 17일 향년 44세로 타계하였다.

 

부인 김춘하金春河는 1962년 ‘모범 어머니상’을 제주도지사 김영관金榮寬으로부터 받았다.

 

한편, 1988년 3월 ‘수산문인회水山門人會’ 대표 이기택李琪澤 외 57명이 서둘러 ‘수산 강상백선생 추모비’를 색달리 1986-1번지에 세웠다.


※(필자의 변): 수산水山의 큰아들은 한시에 능하였고 다른 아들인 무산無山 강통원姜通源은 제주대학 2회 영어영문과 졸업, 한국예총 및 한국문협 제주도지부장과 제주도교육위원회 의장, 제주대 교수로서 현대시에 능했다.1998년 시집 <濟州島序說>을 펴냈다.

 

   
 

▲강상호姜相鎬:1906(광무10)~1974, 일본 오사카에서 항일활동.


강문백姜文伯의 아들로 제주시 월평리 <아쿳>에서 태어났다. 192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야마<橫濱>전문학교를 졸업, 1930년 2월 전협 실업자동맹 도쿄 지방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36년 3월 6일 오사카공소원控訴院에서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74년 5월 20일 경기도 성남시 신흥동 182-12에서 사망하였다.


앞서 1931년 9월 토건 본부의 지령으로 니이가다<新寫>현의 오르그로 파견되어 활동, 1932년 5월 본부 특파 지시에 따라 오사카<大阪>로 가서 동년 8월 4일 전협全協 간사이<關西>지방 지부협의회 상임으로, 또 얼마 뒤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앞서 1930년 도쿄에 있을 당시 강(康)모의 권유로 공산당에 입당, 오사카로 옮긴 후 공산당 간사이지부 책임자로 호시노<星野>와 연락하며 조합에서 활동하였다.


1933년 당에서의 지위는 오사카시 위원회 조합부장 겸 간사이위원회 조합부장이며 동년 6월 검거됐다. 특히 1934년 오사카에는 한인 교포 15만 가운데 약 40%가 제주 출신들이다.


당시 위원회에는 현호경玄好景(성산)이 책임자로 있고 조합부장에 강상호姜相鎬(제주시 월평), 문서배포계 강주호姜周鎬(중문면 상예) 등이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석구姜錫龜:1882(고종19)~1968, 무극대도교의 항일 활동. 본관은 진주, 강지아姜智兒의 아들로 산북 봉개리<봉아름>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5년 동안 한문 공부에 몰두하였다.


1917년경 민족 종교인 보천교에 입교, 한때는 전북 정읍에 있는 보천교의 본부로 이주移住한 바도 있었다.


그는 광주지법에서는 1940년 12월에 4년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더구나 신도 김경식金景軾(71, 화북)은 구속 심문하는 가운데 심한 고문으로 1940년 8월 18일에 옥사하고 나머지 20명에게는 각각 불경죄, 사기, 강간 치상, 육·해군 형법, 보안법, 범인 은닉, 수렵 규칙 위반, 총포 화약 취체법 위반 등 온갖 범죄로 옭아매어 판결을 선고했다.

 

   
 

▲강석범康錫範:1917(일제강점기)~1979, 교육자. 학교 설립자. 자는 길동吉童. 호는 학원學園. 본관은 신천, 서귀포시 보목동<볼래낭-캐>에서 강덕진康德鎭의 6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시츠오카현<靜岡縣> 이와다군<盤田郡> 소재의 교원양성소를 졸업, 1953년 제주상고를 설립, 교장이 되면서 명륜明倫학원의 재단확립과 사립 명문 실업고교로 기반을 다졌다.


1977년 8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하는 제25차 세계교육자대회(WCOTP)에 대한교련회장 이선근李瑄根 박사와 함께 참가하여 식견을 넓힐 기회를 가졌다. 사후 전문학교는 타인의 손에 넘어갔으나 문하생들에 의해 그의 흉상胸像이 세워졌다.

 

앞서 제주도립초급대학 설립을 측면에서 서둘렀고 동 대학(학장서리 길성운吉聖運)의 교직과敎職科 주임으로, 1955년 5월 제주도교육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57년에 동남아 7개국 순방을 하고, 1961년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부에 도전한 관계로 교장 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3년간 법정투쟁 끝에 승소하므로 교단에 복구되었다.


1942년 광주사범 강습과를 수료하여 처음 발령되었는데 이곳이 전남 무안군 도초都草심상소학교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 강진康津농업실수학교 교유敎諭로 발령되었다. 1947년 3월 목포사범학교 교사로 옮겼다.


이 무렵 삼양해수욕장에서 모래 뜸을 하던 해군제독 김영관金榮寬 도백과 조우하자 도지사의 배를 밟아 그는 수영복 차림으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후일 많은 일화를 남겨 오늘날까지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특히 큰 업적은 1972년 7월 제주명륜학원을 기반으로 제주시 용담동에 제주실업전문학교를 설립한 일이다.


이듬해 3월 개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 건축과·토목과·전기과·공업경영과·가정과 등 5개학과에 신입생 240명으로 출발하였다. 1976년에 거듭 네 번째로 제주도교육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큰아들 강영민은 의사로 육영 사업에 힘썼다.

 

   
▲ 강석범의 자서전自敍傳.

※첨기(제주신보 보도)=올해(2017년)가 故 강석범 선생(1917-1979) 탄생 100주년이다. 학교법인 제주아남학원(이사장 강영민)은 지난 9월 8일 메종글래드 제주에서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와 고인의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故 강석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날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인사말을 통해 “우리나라가 눈부신 발전을 이뤄낼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뜨거운 교육열”이라며 “제주교육의 기둥으로서 교육열을 온몸으로 불태우며 수많은 학생에게 배움의 기회를 열어준 강석범 선생의 도전과 성취의 일생은 제주 교육의 역사 그 자체”라고 말했다.

 

선생은 1967년 사학재단인 학교법인 명륜학원을 설립한 후 제주중학교, 제주상업고등학교(현 중앙고), 제주전문대학(현 제주국제대)를 개교했다. 제주에서 개인이 3개의 사립학교를 설립한 것은 강석범 선생이 유일하다.


그는 학교법인 설립 후 제주중 교장, 제주상고 교장, 제주전문대 학장을 지냈으며,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제주도교육회장을 역임했다. 학원(學園)은 강석범 선생이 생전 스스로 지어 사용했던 아호다. 그의 끊임없는 제주교육 발전에 대한 집념과 제자를 사랑했던 정신은 지금도 도민사회에 회자된다. 

 

그의 이런 발자취와 함께 숱한 ‘기행과 일화’도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제주 장년층 사회에서는 심심찮은 화젯거리다.

 

사학재단 명륜학원은 1979년 8월 그가 작고한 지 5년 후인 1984년 제주전문대의 재정난으로 부도를 맞았으나 그의 장남인 강영민 씨(제주아남학원 이사장·의학박사)가 제주중학교를 살리고 1994년 제주영주고등학교를 설립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강 씨는 명륜학원을 아남학원으로 개명했다.

고동수 기자 esook@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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